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직봉전쟁 (문단 편집) === 전쟁의 종결 === 미국인 목사 프레드와 양크의 중재로 6월 9일 직군 사령부가 있는 진황도에서 정전 교섭이 실시되었다. 6월 11일부터 15일까지 교섭이 행해졌으나 그 사이에도 전선에서 전투가 계속되어 3천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봉군은 3명의 연대장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컸다. 하지만 산해관을 뚫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팽수신 등이 교섭에 적극적으로 응하면서 6월 16일 오후 12시, 장쉐량이 왕승빈과 회견, 휴전을 결정하였다. 6월 17일 영국 함성 컬리호에서 2차 강화회의가 열려 손열신과 장쉐량이 봉군 대표로, 왕승빈과 팽수신이 직군 대표로 배석했다. 이들은 8조로 구성된 강화조약에 서명했고 왕잔위안과 송소렴이 유관에서 철병을 감시, 6월 24일에 철군을 완료하면서 1차 직봉전쟁은 완전한 직군의 승리로 끝났다. 봉군은 3만명이 사상당하고 4만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3천만원의 군비를 소모하는 등 피해가 막심했고 직군은 베이징의 대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